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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셀프 브랜딩

백남준 ① 탄생 90주년, 작품으로 보는 백남준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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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비디오 편집 스튜디오에서 백남준 © The Solomon R. Guggenheim Foundation

괴짜, B급 예술가, 시대를 내다본 천재. 모두 백남준을 수식하는 말입니다. 백남준이 이런 이름으로 불렸던 건, 그의 작품이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백남준의 작품은 다른 예술작품과 달리 심미적이거나, 아름답거나, 감정적 울림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냈죠.

하지만 비디오 아트라는 장르 하나만으로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 장르를 탄생시키기 이전에 백남준은 행위예술, 퍼포먼스 작업을 진행했고, 그 진행 과정 중 비디오 아트가 탄생했죠. 이후 백남준은 첨단 기술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며, 더 새로운 기술을 예술에 적용해나갔습니다. 그렇게 백남준의 예술세계는 방대해졌죠. 음악부터 미술, 행위예술, 종합예술, 인공위성 예술까지 모두 아우른 백남준의 세계. 그 시작은 음악이었습니다.

 

(좌) 첼리스트 샬롯과 함께한 행위 음악 작업 © Gallery Hyundai (우) 퍼포먼스 작업 La Monte Young's Composition 1960 #10 © MoMA

01 행위예술, 퍼포먼스

백남준은 작업 초기, 화가보다는 음악가로 여겨졌습니다. 음악학은 석사까지 취득하고, 6곡의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했죠. 하지만 백남준은 전통적인 음악을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음악은 미술 작품과 달리, 시간에 따라 흘러가며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백남준은 음악을 존재론적으로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행위 음악' 개념을 내놓죠. 음악이 연주되는 과정을 다양한 행위예술을 통해 시각적으로 존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행위 음악 개념은, 당시 음악, 미술 전반에 흐르던 ‘반미술' ‘반음악'주의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기존에 음악을 이루던 틀, 미술을 이루던 틀에 저항한 것이죠.

 

John Cage (1912-1992) © NPR

음악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존 케이지입니다. 존 케이지는 <4분 33초 (1952)>에서 연주자가 4분 33초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보습을 연출했는데요. 악보에 음표가 적혀 이를 연주하는 기존 음악과 달리,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악보에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연주자도 음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음악이라고 이야기했죠.

이를 통해 존 케이지는 기존 음악의 위계질서나, 제도, 전통을 모두 무너뜨렸단 평을 받습니다. 존 케이지는 백남준에게 매우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존 케이지가 보여준 문제의식, 새로운 접근 방법 모색, 새로운 경험 제공은 백남준이 자신만의 표현 방법을 만들도록 북돋워 주었죠.

 

(좌) 스승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백남준 © Ohmynews (우)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의 협동 퍼포먼스 © The Solomon R. Guggenheim Foundation

28살의 백남준은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 Performance of Etude for Pianoforte (1960)> 작품을 선보이며 피아노를 부수고,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는 등 다양한 행위를 선보였습니다. 존 케이지는 백남준의 동료이자 협업자, 스승으로서 평생 함께 다양한 작업을 이어나갔죠.

이후 1967년에는 첼리스트 샬롯 무어먼과 합동 공연을 통해 행위 음악을 이어나가는데요. 샬롯과의 인연은 꽤 오랜 기간 유지되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Opera Sextronique (1967)> 퍼포먼스예요. 이 퍼포먼스는 다른 예술과 달리, 음악에는 섹스가 없다는 점을 꼬집었는데요. 당시 샬롯은 곡이 진행됨에 따라 옷을 하나씩 벗으며 연주를 선보였고, 공연 맨 마지막 순간에는 알몸으로 연주하는 것이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속옷을 벗기 전, 경찰이 들이닥쳤죠. 샬롯과 백남준은 음란죄로 경찰에 체포당했고, 백남준은 풀려났지만 샬롯은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백남준은 예술이 아닌 기행을 일삼는 괴짜로 취급되었는데요. 마치 연극이 영화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행위예술은 비디오 아트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TV 자석 © 백남준 아트센터

02 비디오 아트를 탐닉하다

행위 음악은 진행되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고 종료되면 사라지기에, 이를 기록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백남준은 이를 비디오로 기록했고, 이 비디오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보았죠. 그렇게 행위 음악을 진행하면서 비디오 연구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렇게 연구에 몰입하다 이윽고, 행위 예술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죠. 

“내가 비디오에 대한 연구에 몰두해있을 무렵, 나는 어느 정도 행위 음악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나는 1961년 11월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새 삶이란 텔레비전 기술에 대한 것만 빼고는 내 모든 책들을 창고에 쌓아두고 잠궈버렸다는 말이다. 나는 오직 전자 공학에 대한 것만 읽고 실습했다. ” -백남준 인터뷰 (1986)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들 © artspace.com

이후 백남준은 1963년부터 TV를 활용해 비디오 아트 작업을 선보입니다. 당시 TV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1970년 기준, 일반 가정 한 달 수입 2배 가격인 초고가 제품이었죠. 당시 한국 TV 보급률은 2%대였고요. 그런데 백남준은 이런 시기에 TV를 분해하고 조작해 작품을 선보인 겁니다. 상당히 비싼 작업을 선보였다 할 수 있죠. 

초기에는 TV의 회로를 조작해 그래픽 같은 이미지를 만들다가, 이후 1969년에는 신디사이저라는 영상편집 장비를 일본 기술자와 만듭니다. 그리고 이걸 이용해 1973년 백남준은 <Global Groove>라는 영상을 선보이기도 했죠.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3분가량의 이 영상은 오늘날 최초의 뮤직비디오라 불립니다.

 

TV 부처 © tableaumagazine

백남준은 이처럼 기술을 활용한 비디오 아트 작품을 선보이면서, 작품이 송출되는 TV를 활용한 작품도 내놓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970년대 작, <TV 부처>입니다. 이 작품은 부처상이 TV를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요. TV에 송출되는 건 부처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 작품은 당시 뉴욕 미술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습니다. 그간 오랜 미술의 역사에서 꾸준히 연구되던 ‘거울’의 이미지를 기술을 활용해 새롭게 제시했기 때문이죠.

또 TV와 부처상이 각각 담고 있는 의미도 중요했습니다. 부처상은 종교적인 구도자이자, 동양 지혜의 상징이라 여겨지는데요. 이런 존재가 현대 문명의 상징이자 대중매체인 TV를 보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해석을 안겼습니다. 또 TV가 서구에서 만든 발명품이라는 점에서,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상징하기도 했죠. 이 작품은 현재까지도 서구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작품인데요. 이후 여러 시리즈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TV 정원 © Stedeliijk museum
TV 정원 © flash art

<TV 부처>가 큰 인기를 얻고 난 후, 백남준은 또 한 번 TV 작품을 내놓습니다. 1974년 작, <TV 정원> (1974)였죠. 이 작품에서는 다양한 식물이 우거진 수풀을 이루고, 그 사이사이에 30대의 티비를 배치한 것이 특징입니다. 자연과 첨단 기술이 공존하는 것이죠. 정원 속 TV는 하늘을 향해 놓여있고, TV에서 송출되는 화면엔 <Global Groove>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영상은 마치 TV 꽃이 핀듯한 모습을 연출했죠. 미술관이라는 인공적인 환경에 조성된 자연, 그리고 이 자연과 상반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첨단 기술의 상징 TV가 놓인 모습. 이 작품 역시 <TV 부처>처럼 상반된 두 개의 이미지가 함께 제시되며, 관객들에게 직관적인 생경함을 안겨주었습니다.  

“미술과 테크놀로지에 함축된 진짜 문제는 또 다른 과학적 장난감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급격하게 진보하는 테크놀로지와 전자매체를 어떻게 인간화하는가이다.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인간적인 사용법을 보여주고, 관람자로 하여금 그들이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새롭고 환상적이며 인간적인 방법을 찾아내도록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백남준 인터뷰 (1969)

 

© Stir World

이처럼 기술이 인간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한 예술가는 많지 않았습니다. 예술은 그 특성상 첨단 기술을 배척하고 거부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최근 AI 기술의 발전으로 AI 예술가와 작품이 탄생하자 사람들이 난색을 표하는 것을 보면, 이런 인식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당시에도 기술과 예술을 혼합하는 것은 낯설고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아이디어였는데요. 백남준은 기술을 활용하고, 공존을 고민하고, 철학적 의미를 담아내며 이를 잘 해냈습니다. 이윽고 백남준의 기술을 활용한 예술은 ‘인공위성’까지 뻗어나갑니다.

 

미술시장에 침투하는 AI, 그 가능성에 대하여 : 경매 소식, 아트페어 등 시장의 다양한 소식을 전

© 신세계인터내셔날, 아트빌리지미술시장은 기술 발전과 얼마나 관련있을까요?전혀 무관한 영역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미술시장에 기술의 발전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왔습니다.

bidpiece.com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포스터 © themoviedatabase

03 인공위성 예술

1984년 1월 1일, 백남준은 나이 52세가 되던 해에 전 세계 규모의 행사를 열었습니다. 뉴욕, 파리, 서울, 도쿄에서 생중계된 우주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죠. 이 작품은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인데요. 소설에서 오웰은 인류가 TV와 같은 기계, 매스 미디어에 의해 통제되는 삶을 살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빅 브라더'라는 절대 권력이 인간의 삶을 낱낱이 감시함으로써 인류는 결국 기계의 노예가 될 거라는 종말론적 예언을 소설에 담은 건데요. 그리고 그 시기는 1984년이 될 거라 상정했습니다. 

1984년을 앞두고 백남준은 세상이 그만큼 암울해지진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더 재밌고 풍요로워졌다고 느꼈죠. 그리고 이를 오웰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습니다. 오웰이 빅 브라더의 감시체제가 될 거라 예상했던 TV와 미디어를 통해서요. 그리고 1984년 1월 1일에 이 메시지를 전할 쇼를 기획했죠.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송출 장면, 오른쪽은 존 케이지의 출연 모습 © MoMA

이 쇼에서는 연예인과 유명 예술가들이 출연했습니다.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이브 몽탕 Yves Montand, 로리 앤더슨 Laurie Anderson 등이 대표적이죠. (이 예술가들이 각각 선보인 작업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존 케이지는 독경 등의 반주에 맞춰 작품을 선보이고, 요셉 보이스는 두 명의 터키인 피아니스트를 데려와 3대의 그랜드 피아노 밑에 웅크리고 앉아 네덜란드 미술가가 자신의 수염을 밀게 했습니다.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이 동시에 나열되는 순간이었죠.) 오프라인에서만 존재하던 행위예술이 백남준을 통해 전 세계에서, 온라인으로 동시에 진행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작업은 기술, 규모, 기획 면에서 모두 파격적이었습니다. 인공위성을 활용하고, 전 세계 방송국과 함께 진행했으며, 동시대 예술가들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위해 작품을 선보이고, 기술이 이토록 발전했지만 오웰이 예견한 만큼 암울하지 않은, 축제의 장이 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명의 예술가가 기술을 통해 전 세계인에게 메시지를 전한 것. 미술사에서 전례 없던 파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 Amazon

방송이 시작되자 미국에서는 7%의 시청률을 기록합니다. 평균 시청률의 두 배가 넘는 수치였죠. 뉴욕타임스에서는 “이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새로운 쇼였기에 비록 시청자들은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를 잘 알지 못했지만, 진정 의미 있는 유명 인사들이 출연했고 장면 장면들은 신뢰감을 부여했기에 모든 것이 다 타당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백남준은 이 작업을 통해 미디어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질 수 있었죠.

이를 계기로 백남준은 1984년 6월 22일, 34년 만에 조국인 한국에 돌아오게 됩니다. 그전까지 백남준은 세계 예술계에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많이 없었는데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위성 중계를 통해 한국에 방영이 되며 백남준이 재조명받게 된 것이죠.

 

(좌) 귀국 후 인터뷰하는 백남준 © 동아일보 (우) 다다익선의 모습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백남준이 보여준 것은 위성 기술, 비디오 아트 같은 첨단 기술과 예술의 조화도 있었지만 백남준의 기획력과 협업 정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돌아온 한국에서 백남준은 그의 모든 내공이 결합된 작품을 선보이기로 합니다. 바로, 1988년 작 <다다익선>이죠. 

<다다익선>은 ‘규모의 거대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백남준이 한국에 들어온 1984년, 당시 과천에서는 다가올 88올림픽을 위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짓고 있었습니다. 2년의 공사 후 지어진 미술관에는 동그랗고 높은 중앙 홀(로톤다)이 있었는데요. 이를 본 백남준은 여기에 <제3 인터내셔널 기념탑> 같은 작품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죠. 그리고, 1천여 개의 TV로 쌓아 올린 탑, <다다익선>을 구상하게 됩니다. 

이 작품을 설계하기 위해선 아이디어를 현실화해줄 기술자, 그리고 TV를 지원해 줄 재정적 후원자가 필요했습니다. 백남준은 경기고 후배이자 건축 연구소 광장의 대표인 건축가 김원에게 노력 기부를 설득하죠. 그리고 삼성전자에 직접 찾아가 TV  1천 대 지원 요청하고, 승인받습니다. 이후 백남준은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국제전화로 계속 소통하며 작품 제작을 이어갔죠. 수백만 원의 통화비를 직접 감당하며 백남준은 2년간 이 프로젝트를 지휘했습니다.

 

최근 재가동된 다다익선의 모습 © YTN

디테일함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다다익선>이 공개되는 날인 개천절을 기념해 TV 개수를 1003개로 맞추라 지시하기도 했죠. 백남준은 후에 <다다익선>을 설명하며 ‘신구세대 앙팡 테러블들의 즐거운 협연'이라 언급했는데요. 실제로 백남준은 작품의 설계와 디테일을 꼼꼼하게 챙겼지만, 협업하는 이들에게 많은 선택권을 위임하기도 했습니다. TV에서 상영할 영상은 총 8편이었고, 이중 4개의 영상을 선택해 송출하는데, 이 영상 선택권을 국립현대미술관에 넘겼죠. 또 TV가 고장 날 경우 교체해도 좋으며, 이 전권을 테크니션에게 일임한다는 각서도 써주었습니다. 덕분에 <다다익선>은 백남준이 떠난 지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34년간 상설전시 작품으로 운영되고 있고요. *현재 안전을 고려해, 매주 목, 금, 토, 일 오후 2시-4시에만 가동합니다. 감상은 그 외 시간도 가능! 자세한 내용은 국현미 과천에서 확인해보세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백남준 © artnewspaper

04 백남준의 최전성기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후 백남준은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한국에서 <다다익선>이라는 대작을 남기기도 했고요. 하지만 백남준이 이처럼 유명해지기 전부터 그의 예술적 가능성을 알아본 국가는 독일이었습니다. 비디오 아트를 시작한 곳도 독일이었고요. 그리고 1993년, 백남준의 나이 61세 때 그는 독일 대표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나가게 됩니다. 당시 수많은 독일 예술가를 제치고 이방인인 백남준이 선정된 것에 많은 비난 여론이 있었지만, 백남준을 뽑은 독일관 커미셔너 클라우스 부스만은 “백남준은 독일제다. 독일에 살고 있고, 독일에서 비디오 아트를 탄생시켰으며, 첫 비디오 아트 전시도 1963년에 독일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했다. 독일인들은 남준을 자랑스러워 한다"고 이야기했죠.

백남준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자 초고속도로-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까지>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선보입니다. 이 작품은 전 세계가 전자 고속도로로 연결될 것이라는 예언적인 작품이었어요. 여기서 말하는 고속도로는 오늘날의 인터넷망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백남준의 적품은 전위적이면서도 심오하다는 호평을 얻으며, 최고 상인 황금사자상을 받게 되었죠. 이후 백남준은 독일에서 예술가에 대한 최고 존칭인 ‘마에스트로’ 호칭을 받게 됩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백남준의 작품 © artnewspaper

당시 백남준의 전시를 인상 깊게 본 예술계 인사들이 많았습니다. 구겐하임 미술관 관장인 토머스 크레인스 Thomas Krens는 백남준에게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제안하기도 했죠. 7년 후의 일정이었지만 백남준은 다가올 회고전에 사활을 걸기로 합니다.

하지만 시련이 찾아옵니다. 1996년, 백남준이 뇌졸중을 겪게 된 것이죠. 뇌졸중은 백남준의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겪은 질병이었습니다. 하지만 생존 작가로서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여는 건 엄청난 영광이었기에, 백남준은 이것 하나만을 바라보고 작품 활동에 정진합니다.

 

(좌) 구겐하임 전시 스케치 (우) 실제 전시 모습 © The Solomon R. Guggenheim Foundation

백남준은 구겐하임에서 선보이고 싶은 작품이 있었습니다. 바로, 1960년대 중반부터 연구해 온 레이저 기술을 활용한 작품이었죠. 이전까지 레이저는 다른 영상을 쏴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습니다. 레이저 자체보다, 레이저를 통해 보이는 이미지가 예술로 여겨졌죠. 백남준은 사람들이 레이저 광선 자체를 예술로 감상하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구겐하임 전시에서 <달콤하고 우아한 sweet and sublime>이라는 제목의 레이저 작품을 선보였죠. 이 작품은 빨간색, 파란색, 흰색 등 여러 가지 빛깔의 레이저 광선이 미술관 천장으로 쏘아 올려져 쉴 새 없이 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겐하임 측에서는 회고전인 만큼, 신작인 레이저 작업뿐만 아니라 백남준의 과거 작품을 다 선보이길 원했습니다. 백남준은 뇌졸중으로 구안와사가 와 왼쪽 반신이 마비되고, 말하기도 힘들었지만 과거 작품들을 손보고 재작업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전시장 메인 홀에는 프랑스에서 극찬받았던 작품 <TV 정원>을 깔고, 미술관 곳곳에는 <TV 부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영상 등 그의 대표작을 설치했죠.

 

TV 정원 © The Solomon R. Guggenheim Foundation

정식 오프닝에 앞서 이틀간 열린 프리뷰 행사에서는 2천여 명의 후원자, 작가, 기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왔고 마지막 밤 프리뷰에는 1, 2층 복도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대성황을 했습니다. 뉴욕 타임스에서는 두 페이지에 걸쳐 특집 리뷰를 냈고, CBS 방송은 30분짜리 특집 방송 편성했죠. 구겐하임에서 아시아 작가의 개인전이 열린 것은 백남준이 최초였습니다.

 


백남준의 작품세계는 그 어떤 예술가보다 다채롭습니다. 음악, 미술을 편가르지 않고 모두 예술로 바라보았고, 최신 기술을 인간화하고 예술화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한 덕분이었죠. 포용적인 사고방식과 새로운 기술에 탐닉하며 학습한 백남준은 스스로를 ‘학습적인 예술가'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기존의 아카데믹한 예술을 심도 있게 공부하고, 현시대의 예술과 기술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며, 이 흐름이 미래에 어떻게 발전할지 깊게 사유한 덕분이었습니다. 백남준이 세상을 떠났던 2006년, 그를 추모하며 언론에서 남긴 평으로 마무리합니다.

 

인류 최초의 화가와 조각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비디오 아트의 창조자는 누구인지 확실하다.
백남준, 그야말로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이자 조지 워싱턴이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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