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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셀프 브랜딩

데미안 허스트가 '약국' 컨셉 레스토랑으로 돈 버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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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앞의 데미안 허스트 © Artribune

오늘날의 예술가는 작품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파는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가 곧 작품 가치로 직결되죠. 이런 흐름 속 작가들은 과거처럼 신비롭게 꽁꽁 숨겨져 있기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해야 합니다. 그 점에서 가장 매력적인 작가는, 바로 이 남자입니다. 상어를 박제해 전시한(2005) 데미안 허스트죠.

 

박제상어를 통해 데미안 허스트는 마케팅의 대가라 불렸습니다. 작품을 통해 매스컴과 대중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반응하게 만들었죠. 덕분에 허스트는 이전에 신비주의 마케팅, 스타 마케팅으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던 앤디 워홀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다 여겨지는데요. 일찍이 주목받은 허스트의 기량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마케터'가 아닌, '사업가'로서의 면모죠. 

 

 

약국 콘셉트의 레스토랑을 차리다

데미안 허스트의 레스토랑 'Pharmacy' 전경 © British GQ

때는 1997년. 데미안 허스트가 이미 잘 나가는 작가 반열에 올랐을 때입니다. 허스트는 친구들과 함께  영국 노팅힐에 레스토랑 겸 바를 오픈했습니다. 가게 이름은 약국 Pharmacy. 예술가가 공간을 꾸리는 일은 많습니다. 키스 해링은 본인 작품을 굿즈로 제작해 굿즈샵 Pop Shop을 꾸렸고, 뱅크시 GDP라는 이름의 가게를 만들어 굿즈와 포스터를 판매했습니다. 하지만 허스트는 이들보다 '공간'에 진심이었습니다. 레스토랑의 기능을 하지만, 공간은 완전히 약국 같아 보이길 원했죠.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생경한 경험을 선사하길 원했습니다.

 

공간은 환상적이었습니다. 명품 브랜드 프라다에서 레스토랑 직원들의 유니폼을 디자인했고, 허스트는 자신의 작품 중 약국 콘셉트를 극대화해줄 '약장 시리즈'와 '나비 그림' 작품으로 실내를 가득 채웠죠. 판매하는 술 역시 콘셉트에 한껏 몰입한 모습이었습니다. 칵테일 이름은 '무독성', '고통을 완화시키는 볼타롤' 등 화학 약품 이름으로 붙여졌죠. 허스트는 이 레스토랑의 외관도 정말 약국처럼 보였으면 했습니다. 거리를 걷다 허스트의 레스토랑을 마주치면, 정말 약국이라고 착각할 법하게 만들었죠. 문 앞에 약국을 상징하는 연초록색 네온 등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후에는 영국왕립제약협회의 고발로 치워졌습니다.) 

 

Pharmacy 외관과 내부에서 먹을 수 있는 식사  © The Guardian

이 레스토랑은 6년 간 영업을 이어갔습니다. 2003년, 문을 닫게 되면서 가게의 집기와 가구를 창고로 옮기던 중, 이 광경을 우연히 소더비의 현대미술 스페셜리스트, 올리버 바커 Oliver Barker가 보게 됩니다. 올리버는 '저 집기류를 경매에 팔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죠. 생각은 바로 행동으로 이어져, 현대미술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인 데미안 허스트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경매 회사인 소더비의 협업이 시작됐습니다. 

 

 

소더비 경매에 집기류를 처분하다

데미안 허스트가 꾸준히 이어온 '약장 시리즈'  © Artsy

생존 작가가 경매 회사와 직접 계약을 맺고 작품을 파는 일은 역사상 최초였습니다. 경매회사는 컬렉터에게 작품을 위탁받아 경매를 기획하고, 판매하는 식으로 경매를 꾸렸습니다. 때문에 작가와 굳이 소통할 일이 없습니다. 미술시장에서 작가와 경매회사는 거리가 먼 사이였죠. 심한 경우, 경매회사를 혐오하는 작가들도 있었습니다. 경매를 통해 작품이 잘 팔릴 경우 작가의 평균 가격을 올리기도 하지만, 유찰 등 상황이 생기면 가격이 하락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작가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존재로 여겨지죠. 이런 시장 관념과 상관없이 허스트는 과감하게 경매회사와 계약하고, 레스토랑의 집기류 150여 개를 판매하기로 합니다.

 

허스트는 이 경매에 매우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경매 도록을 직접 디자인했고, 홍보, 마케팅, 경매 진행에 필요한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열정적으로 관여했죠. 경매에 나온 물품들은 다채로웠습니다. 레스토랑에서 사용된 재떨이, 마티니 잔, 양념통 세트, 벽지 등이 있었죠. 이들의 추정가 총액은 약 300만 파운드(한화 약 47억 원)로 평가되었습니다. 

 

데미안 허스트가 직접 디자인 한 소더비 경매 도록의 모습  © Artificial Gallery

그리고 경매 직후 공개된 실제 낙찰액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추정가의 세 배가 넘는 금액인 1,100만 파운드(한화 약 172억 원)를 달성했죠. 옥션과 다이렉트로 계약한 덕분에, 허스트는 낙찰가의 100%를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경매회사는 갤러리처럼 5:5로 떼어가지 않고, 거래 수수료만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소더비 경매를 통해 허스트가 얻은 수익은 6년간 레스토랑을 영업하며 번 돈보다 많았습니다. 레스토랑 처분 경매로 172억의 돈을 번 허스트는 일간지 일면을 장식했죠. 예술가와 경매회사의 이례적인 1대 1 거래라는 점, 작품이 아닌 레스토랑 집기류 판매라는 점, 그리고 추정가의 3배 넘는 판매 기록 달성했다는 것. 이 모든 충격적인 성과는 허스트의 명성을 높였고, 경매 한 번으로 허스트는 생존 작가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데미안 허스트의 사업가적 기질

© The Dallas Morning Post

경매를 기획한 소더비의 젊은 스페셜리스트, 올리버 바커 Oliver Barker는 허스트와의 협업을 회상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데미안 허스트는 정말이지 영감이 넘칩니다. 머리 회전도 빠르고, 무엇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마케팅 일정도 확실하게 챙겨줬으며, 잡다한 일에까지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또, 뛰어난 비즈니스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위험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파격적인 시도를 하되, 최선을 다해 일한 데미안 허스트. 이후 2008년, 허스트는 더 과감한 시도를 이어갑니다. 본인 작품 200여 점을 직접 소더비 경매에 위탁한 것이죠. 이번에도 갤러리나 딜러의 도움은 없었습니다. 허스트와 소더비의 1:1 계약이었죠.  <내 머릿속의 아름다움 Beautiful Inside My Head Forever>라는 제목으로 열린 경매에서 그의 작품은 1억 1100만 파운드(한화 약 1,737억 6천만 원)이라는 엄청난 판매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경매가 열린 날은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미술시장은 침체됐죠. 작품은 팔리지 않고, 유명 예술가의 작품 가격은 떨어졌습니다. 시장에서는 데미안 허스트가 '미술시장 호황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잔치를 벌였다'거나, '귀신같이 타이밍을 잘 맞췄다'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내놓았습니다. 허스트가 리먼 브라더스 파산을 예견하고 날짜를 잡진 않았겠지만, 그가 확실히 알고 있던 게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사업가적 기질이 본인에게 큰돈을 벌어다 줄 거라는 것.

 

이후 두바이, 모스코 등에 분점을 낸 허스트의 레스토랑 모습  © Conde Nast Traveler

시장에서 잘 팔리는 작가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사업가적 기질이죠. 본인이 가진 경제적 가치를 최대치로 끌어올릴 방안을 고민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 데미안 허스트가 가장 잘하고, 열심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미술계 전문가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습니다. '사업가적 기질이 있어 성공한 것보다, 컬렉팅 하는 사업가들이 본인 성향과 닮은 작가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싸움입니다. 반면, '많은 현대미술가들이 이미 비즈니스 원리를 기반으로 성공하고 있다'는 지지도 있습니다. 예술가의 영혼을 담아, 공들여서, 힘들게 작품 하나 내놓는 것보다, 언제든 컬렉터의 수요에 맞춰 작품을 만들어내는 안정된 제작 전략을 선보이는 작가들이 잘 나간다는 것이죠. 

 

데미안 허스트의 스폿 페인팅 © Arken

허스트는 이런 면에서 사업적으로 안정된 시스템을 갖춘 작가입니다. 그의 대표 작품 시리즈 중 하나인 <스폿 페인팅 Spot Painting>은 철저한 설계 하에 조수들이 제작해 내죠. 시간만 있다면 수천 점도 거뜬히 제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허스트는 스폿 페인팅을 수백 점 제작해, NFT로 디지털화했습니다. 실물 작품과 NFT 작품을 수백 점 제작하면서 노동한 건, 그의 조수들 뿐이죠.

 

올해 10월에는 이 작품 중 절반 이상을 불태우며, NFT 작품만 남기기도 했다. 매우 과감한 행보였죠. '허스트가 허스트 했다'는 반응이 이어졌습니다. 불태우는 행사에 기자들을 초대해 세리머니를 홍보했기 때문이죠. 과감한 시도를 할 줄 아는 사업가적 기질, 그리고 이를 잘 포장해 판매할 줄 아는 작가, 데미안 허스트. 그의 사업가적 기질은 시대 변화에 발맞춰 계속 진행 중입니다. 

 


참고문헌

윌 곰퍼츠 (2012), <발칙한 현대미술사>, RHK

 

✍🏻 데미안 허스트의 마케팅적 면모가 궁금하다면 '데미안 허스트가 박제상어를 만든 이유'도 함께 감상해보시길 추천드려요. 예술가의 파격적인 시도와 사업가적 기질에 대해 더 알고싶은 분께는 미술시장 딜러이자 월 스트리트에서 선물 중개인으로 일했던 예술가, '제프 쿤스: 관종력과 실력으로 시장 점유율을 증대시킨 방법'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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