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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셀프 브랜딩

예술가가 언론으로 돈 버는 방법: 앤디 워홀의 7가지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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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 앤디 워홀 © The Guardian

앤디 워홀은 언론을 교묘하게 이용한 첫 번째 예술가입니다. 스스로를 매력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언론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또 잘 해냈죠. 어느 정도 브랜딩이 완성되고 나서 앤디는 직접 잡지를 창간하고 TV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앤디 이전까지 예술가는 그저 그림 뒤에만 존재하는 사람이었다면, 이후엔 그림보다 앞에 서서 대중을 맞이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죠. 앤디 워홀의 성공 전략 2화, <예술가가 언론으로 돈 버는 방법>입니다. 

 

 

겉모습부터 사생활까지 완벽하게 연출하다

작품 앞의 앤디 워홀, © Wikipedia Commons

겉모습 | 언론을 이용하기 위해선 그들이 궁금해할 만한 것을 계속 흘려야 했습니다. 앤디는 상업사회로 접어든 시점에, 상업적 특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인 것처럼 스스로를 꾸몄습니다. 성형한 코, 이국적인 은색 가발, 두꺼운 화장, 독특한 액세서리 등을 활용했죠. 넘치는 자본으로 풍요로운 미국사회, 다양한 인종이 모이며 개성이 제각기 모습으로 뻗어가던 때 앤디의 모습 역시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앤디 워홀과 그의 애인 제드 Jed Johnson © Artnet / © Interview Magazine

사생활 | 앤디는 이것만으로는 언론의 관심을 끌기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보여주는 것이 아닌 보여주지 않는 것에서 매력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판단했죠. 그는 성생활이나 사생활 등,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이용했습니다. 앤디에게는 몇몇 남자 애인이 있었지만, 늘 대중 앞에서는 무성애자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성적으로 초월한 존재처럼 행동했죠. 사람들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생활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게 자라났죠. 앤디는 언론에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해, 알 수 없는 묘한 사람인 것처럼 본인을 꾸렸습니다. 

 

1950년, 22살의 앤디 워홀 © wikipedia commons

약간의 관종기 | 앤디는 원래 조용하고 소극적인 내향인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예술가가 되고 나서까지 쭉 그랬죠. 하지만 필요할 때에는 적극적으로 나설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발로 뛰며 일을 따낸 것처럼, 자신을 언론에 각인시키기 위해 모든 파티에 다 참석했습니다. 셀럽과 카메라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 자리에 향했죠. 자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단 한순간도 사그라들지 않게끔요. 

 

 

예술 사업은 당연히 따라오는 수순이다.
나는 처음에 상업예술가로 시작했고, 사업예술가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사업을 잘 하는 건 가장 흥미로운 예술이다.

-앤디 워홀-

 

 

대중매체의 예술화

영화 촬영 중인 앤디 워홀 © Revolver Gallery

앤디 워홀 앤터프라이즈 | 앤디는 1957년, 29살에 회사를 세웠습니다.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이뤄줄 회사였죠. 앤디는 이 회사를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합니다. 수많은 실크스크린 작품과 조각 작품, 영화 등을 제작했습니다. 앤디의 작품 공장, 팩토리도 이 산하에 있었고요. 

 

잡지 <인터뷰> 창간 | 1969년에는 잡지 <인터뷰>를 창간합니다. 초기의 기사에는 현대 영화예술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지만, 갈수록 상류사회에서 흘러나오는 가십거리를 다루는 잡지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이는 앤디에게 오히려 잘 된 일이었습니다. 이슈의 중심에 본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앤디는 화려한 뉴욕 상류사회의 단면을 잡지에 싣기 위해 수많은 대화를 녹취했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손에 들고 수시로 눌러댔습니다. 곧 앤디 워홀 주변엔 그의 유명세를 활용하려는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그럴수록 앤디의 영향력은 더 커져갔죠.

 

인터뷰 잡지의 여러 표지들 © interview magazine

TV 프로그램 <앤디 워홀 TV> 진행 | 앤디는 티비에 종종 출연하곤 했습니다. 단순 인터뷰 참여가 아닌, 광고모델을 하기도 하고, 친구가 감독을 맡고 있는 드라마에 우정출연을 하기도 했죠. 그리고 1982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그램도 진행합니다. 이름하여 <앤디 워홀 TV>. 이 프로그램은 일종의 토크쇼였습니다. 예술계 및 패션계 인사들이 출연해 앤디와 대화를 나누는 식이었죠. 앤디는 특별한 대본 없이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예술가가 하라는 작품은 안 하고

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앤디는 작업도 열심히 했습니다. 방향성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함이 있었지만요. 1962년 말, 앤디는 유명인의 모습을 실크스크린에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비스 프레슬리, 재키 캐네디 등 유명인물이 실렸죠. 작품으로 재해석된 유명인의 모습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됩니다.

 

마릴린 먼로 초상 앞의 앤디 워홀 © Artsy

하지만 앤디는 단순히 관심을 끌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림 속 인물들에겐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모두 제각기 비극적인 순간을 겪었다는 것. 마릴린 먼로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엘리자베스는 약물 과용을 겪었습니다. 재키 캐네디는 대통령이던 남편을 갑자기 잃은 비극의 주인공이었고요. '비극적 인물 시리즈'가 인기를 끌자 앤디는 새로운 시리즈를 내놓습니다.

 

바로, 사고 현장을 그대로 재현한 '죽음과 재난 시리즈'였죠. 파티 드레스를 입은 채 교통사고로 사망한 <Five Deaths, 1963>, 썩은 참치를 먹고 사망한 가정주부를 그린 <Tunafish Disaster, 1963>, 교통사고의 순간을 그려낸 <Silver Car Crash, 1963> 등 미국에서 발생한 재난 사고 사진을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충격적인 이미지를 작품으로 만드는 지 이해하기 어려워했지만, 확실히 어그로는 잘 끌렸습니다. 앤디가 늘 목말라하던 관심은 신작이 나올 때마다 꾸준히 업데이트되었죠. 관심은 늘 좋은 방향으로만 이어지지 않기에 혹평도 있었습니다. 앤디는 이에 대해 '중요한 것은 재난과 죽음 자체가 아닌, 그것에 대한 이미지'라 말합니다. 반복적으로 나열된 재난과 죽음의 이미지를 보며 사람들은 끔찍한 상황에 놀라기보다 둔감해집니다. 앤디는 그의 수프캔 작품처럼, 넘치는 자본에서 사람들이 자극에 무뎌진 듯 죽음과 재난에도 무뎌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Little Electric Chair, 1965 © Christie's

1965년 작품 <Little Electric Chair, 1965>가 나왔을 때는 논란이 좀 커지기도 했습니다. 로젠버그 부부가 소련에 핵기밀을 넘겨준 죄로 사형을 당했던 의자였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그림에 여러 의미를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속 3개의 문이 형법재판소의 목표인 '응징, 투옥, 범죄 억제'를 상징하는 것이라거나, '천당, 연옥, 지옥'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등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하지만 앤디는 정작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절대로 어떤 특별한 뜻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강경한 부정은 오히려 마케팅 수단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앤디가 '아무 뜻도 없다'라고 말할수록 더 관심을 가졌죠. 

 

 

작품이 평가받을 시간에 더 많은 작품을 만들어라.
작업이 좋은지 나쁜지, 사람들이 좋아할지 싫어할지는 관객이 결정할 일이다.
고민하지 말고, 일단 완성하라.

-앤디 워홀-

 

 

2번의 총격사건, 끄떡 안 한 앤디 워홀

(좌) 샷 마릴린 시리즈, (우) 앤디 워홀이 작품에 활용한 실제 사진 © wikipedia commons

총 맞은 마릴린 먼로 | 작품에 대한 판단을 관객에게 유보하며, 앤디는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됩니다. 이런 무심한 태도가 되려 더 매력적으로 비쳤기 때문이죠. 앤디가 1964년 제작한 마릴린 먼로 실크스크린 작업에는 'Shot'이라는 문구가 붙어있습니다. 총 맞은 마릴린 먼로라는 뜻이죠. 이 작품은 앤디가 언론을 정말 잘 다루는 예술가라는 걸 보여줍니다. 이 작품 시리즈를 완성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앤디의 작업실로 도로시 포드버라는 친구가 찾아옵니다. 그는 작품에 총을 쏴도 되겠느냐고 묻고, 앤디는 그러라고 했습니다. 이윽고 그는 정말로 겹쳐져 있던 마릴린 시리즈에 대고 총을 발사했죠. 앞쪽 세 개 작품엔 총알구멍이 났습니다. 

 

앤디는 구멍난 작품 세 점을 버리고 다시 만드는 대신, 그 소문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그리고 총알구멍 작품들을 복원해 시장에 내놓았죠. 물론, 다른 작품들보다 더 높은 가격을 매겨서요. 후에 경매에서 총 맞은 마릴린 작품은 다른 마릴린 작품보다 두 배 더 비싼 가격에 팔립니다. 작품에 담긴 스토리 덕분이죠. 2022년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Shot sage Blue Marilyn>이 2,485억 원에 낙찰되며 현대미술 작품 최고가 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습니다. 

 

(좌) 앤디 워홀 총격 사건이 보도된 모습 (우) 앤디에게 총을 쏜 벨러리 솔라나스 © TIME

비극을 가져온 또 다른 총격사건 | 총 맞은 마릴린 먼로 작품이 앤디에게 부와 관심을 가져다 주었다면, 또 다른 총격사건 하나는 앤디의 삶을 비극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앤디의 팩토리에서 일하던 여배우, 벨러리 솔라나스가 앤디 워홀을 총으로 쏜 것이었죠. 앤디는 총을 맞았음에도 생존했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지만, 삶에 대한 욕구가 강한 덕분이었다고 의사는 이야기했죠. 퇴원 후 앤디는 코르셋을 입고 생활합니다. 한 동안 두려움에 떨며 지내고, 팩토리의 문을 닫기도 했죠. 퇴원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앤디는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예술가로서 누린 유명세의 양면성을 보여준 사건이었죠. 

 

의뢰받은 초상화 작업 앞의 앤디 워홀  © wikipedia commons

죽음의 문턱을 다녀온 예술가에게 사람들이 갖던 관심은 엄청났습니다. 앤디는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황이었지만, 이 관심을 식힐 수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초상화 작업을 시작하죠. 자신의 작품에 관심갖던 상류층 인사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초상화를 의뢰받아 작업합니다. 작품 하나 당 5만 달러의 고가였지만, 상류사회 인사들은 주문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가장 핫한 예술가가, 죽다 살아나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반짝이는 트로피가 되었기 때문이죠.

 

© NBC news

앤디는 이 작업을 통해 그림에 대한 자신감도 회복하고, 자신의 명성과 인기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림은 잘 팔지만 인지도가 낮은 예술가였다면, 이런 기회는 오지 않았을 겁니다. 앤디가 총격사건 이후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도 결국 그간 언론을 잘 이용한 덕분이었죠. 

 


자료출처

미술이야기 제 64권 제 11호 <전시회를 보는 두 가지 방식>, 

정민영, 2016 앤디 워홀 일기,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2022 앤디 워홀 예술과 상업성과의 연계성 연구, 정금희

 


✍🏻 현대미술 최고가 기록을 갈아치운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 Shot Sage Blue Marilyn>이 궁금하다면 이 게시물을 확인해보세요. 앤디 워홀의 성공전략 ⓵화는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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