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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셀프 브랜딩

김환기: 50년의 예술적 노력이 현대미술에 한 획을 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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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회고전 전시 포스터  © 호암미술관

김환기 작가의 회고전이 호암미술관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김환기 작가는 20세기 한국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에요. 서구의 시선에서 처음 주목한 한국인 작가이기도 하고, 국내 미술시장에도 유일무이한 성과를 남긴 인물이기 때문이죠. 한국 미술품 최초로 100억 원을 넘긴 인물이자, 한국 미술품 경매 낙찰 총액 top 10 중 9점에 김환기의 작품이 올라있습니다. 

 

언뜻 김환기는 운이 좋은 인물로도 보여요. 한국 전쟁 후 어려운 시기, 남들은 먹고살기 바쁠 때 예술을 하던 인물이었고 이 덕분에 서울대, 홍익대 교수 등을 역임하며 사회적 명성도 얻었죠. 하지만 그 이면에는, 50년간 삶을 치열하게 살아낸 한 인간이 있었습니다. 

 

 

탐미주의자, 김환기

작업 중인 김환기 작가의 모습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우선 예술가로서의 김환기를 알아가 볼게요. 김환기 작가는 상당한 탐미주의자였습니다. 사물을 보는 안목도 뛰어났고,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능력도 탁월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엔 늘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했죠.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들이 있습니다. 달항아리, 꽃, 학, 사슴, 여인, 그리고 자연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풍경들이죠. 이 요소는 김환기 생에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고, 계속 발전되어 나타납니다. 그의 그림을 시대순으로 감상하다 보면, 이 요소들이 계속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는데요. 이런 요소는 점점 미니멀해져, 이후에는 선이나 면 등 화면을 분할하는 장치로 쓰이기도 해요. 요소들의 특징을 살리며 점차 추상화시킨 것이죠. 그의 예술은 아름다운 요소를 찾고, 이 아름다움에 집중하고, 이를 미니멀하게 덜어내고, 점차 추상화 되어가는 모습을 띕니다.

 

항아리와 매화가지, 1958 / 사슴, 1958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한편 같은 시기 서구 미술계에서는 한참 현대미술 흐름이 시작되고 있었어요. 현대미술은 김환기의 예술세계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김환기는 아름다움 그 자체를 그려내는 전통적인 회화를 선보였지만, 현대미술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만드는 철학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때문이에요. 변기를 전시한 뒤샹의 <샘>이 대표적이에요. 미술관에 기성품을 전시하는 레디메이드 사조를 제시하며, 예술가의 역할은 어디까지 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등의 철학적 질문을 낳았죠. 

 

하지만 김환기는 계속해서 아름다운 것을 더욱 아름답게 표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내놓은 게 오늘날 김환기의 대표작, 전면점화 시리즈예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전면점화

영원한 것들, 1956-57 / 영원한 노래, 1957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김환기의 아름다움에는 테마가 있었습니다. 바로, '한국적인 것'이죠. 김환기는 이전에 “한국적인 것이 가장 국제적인 것”이라 이야기한 바 있어요. 정확히는 일기에 이렇게 썼죠. “나는 동양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한다고 해도, 내 이상의 것은 할 수가 없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이요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이기에는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김환기는 해외로 진출했던 1세대 한국 화가입니다. 파리에서 3년, 뉴욕에서 11년간 활동했죠. 이때 김환기가 결심한 건, 절대 서구 화풍을 '답습'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파리 활동 당시, 개인전을 열기 전까진 그 어떤 전시회도 보러 가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면 뭐 하러 유학을 떠나나?' 할 수 있지만, 김환기는 그저 그들의 화풍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 간접적인 방식으로 수용하고 싶어 했어요. 파리의 풍경, 생활 방식 등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본인만의 예술세계를 만들고 싶었던 거죠. 이후 김환기는 파리에서 그 독창성을 인정받고 금의환향하게 됩니다. 

 

산월, 1962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아름다움에 집중하고, 한국적인 것 만을 추구하던 김환기. 덕분에 그는 파리와 한국에서 인정받은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파리에서의 성공은 록펠러 재단의 재정적 지원까지 연결됐죠. 김환기는 뉴욕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뉴욕에서의 반응은 좋지 않았어요. 유화를 이용해 두껍게 그려낸 그림이 서구 회화와 비슷해서 큰 특별함이 없어보였던 것이죠. 김환기는 한국적 아름다움을 담아낸 대상을 그리며, 충분히 민족적이고 한국적인 그림이라 생각했지만, 미국의 시선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유화 물감으로 두텁게 그려낸 그림은, 그들 입장에서는 특별할 게 없었죠. 

 

이후 김환기는 화풍을 완전히 바꿔버립니다. 유화 물감을 두텁게 그려내는 방식을 버리고, 수묵화처럼 얇게 여러 번 펴바르는 방식을 택했죠. 붓도 유화 붓이 아닌 동양화 붓을 사용합니다. 그간의 화풍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시도였죠. 그런가 하면, 이전의 화풍의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변화도 있었습니다. 김환기는 자연이나 달항아리 등 한국의 아름다움을 담은 요소들을 직접적으로 그려내곤 했는데요. 점차 그 아름다움의 특징을 강조한 점이나 선 등 추상적 요소를 더하기도 했었습니다. 꾸준히 미니멀하고 추상화되어 가던 모습을 보이다가, 뉴욕에서의 계기로 완전한 추상을 선보였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그렇게 나온 것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입니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제목인데요. 김환기가 그간 작품에서 그려온 자연의 요소를 점으로 함축해 보여줍니다. 그간의 작업이 소설 같았다면, 이 작품은 시와 같았죠. 50여 년의 예술세계를 함축적으로 점을 통해 응축해냈습니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업방식이 그려집니다. 캔버스에 점을 찍고, 그 테두리를 에워쌀 정도로 큰 점을 또 찍죠. 물감을 얇게 발라 화면 전체로 점이 확장되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 시리즈는 캔버스를 점으로 가득 채운다는 의미에서 전면점화라 불리죠. 이들은 김환기가 그동안 그려오던 달항아리나 자연 풍경, 꽃이나 나무 등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닌, 그 '곡선'이나 '느낌'을 표현한 완전한 추상화 단계로 접어든 걸 보여줍니다.

 

전면점화 작품은 이전보다 훨씬 큰 호응을 받게 돼요. 소박하지만 화려하고, 과감하지만 절제된 느낌은 한국적 느낌을 물씬 풍기며 뉴욕 화단의 주목을 이끌어냈죠. 오늘날 김환기의 전면점화 작품은 한국 경매 최고 낙찰가 TOP 10 중 9점을 차지하며, 가장 높은 시장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김환기의 <우주>

Universe 5-IV-71 #200, 1971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우주>가 131억 8천750만 원에 낙찰됩니다. 한국 미술품이 경매에서 100억 넘는 가격에 팔린 첫 사례죠. 이 작품은 응찰도 치열했다고 해요. 경매에서 한 작품이 낙찰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2분인데요. 우주는 10여 분 동안 서른 세 차례 경합을 거쳤습니다. 매우 치열한 경매였던 것이죠. 그렇게 시작가 57억 2천만 원에서, 131억의 가격으로 <우주>가 낙찰됩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왜 이렇게 고가에 낙찰된 걸까요? <우주>, 이 작품은 김환기가 뉴욕시절 작업한 전면점화 중 가장 규모가 큰 작업입니다. 가로세로 2.5미터의 매우 큰 정사각 작품이죠. 이 작품은 두 개로 나뉘어 있는데요. 김환기 작업 중에선 유일한 두 폭 짜리 그림이기도 합니다. 가장 큰 규모라는 점, 유일한 두폭화라는 점이 작품의 높은 가격을 형성하게 했죠.

 

이 작품을 구매한 건, 글로벌세아그룹의 김웅기 회장이에요. 처음엔 해외 컬렉터 소장이라는 말이 돌았지만, 다행히 국내 컬렉터였다는 게 밝혀집니다. 김환기의 매우 주요한 작품이기 때문에, 해외 컬렉터가 구매했을 경우엔 명작의 해외 유실이 우려되던 상황이었는데요. 김웅기 회장은 자사 산하의 미술관 S2A에서 <우주>를 선보이며 본인이 소장자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대중과 함께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죠. 이 작품은 이번 호암미술관 전시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작가 여담: 수화 김환기

김환기 작가의 모습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김환기는 ‘수화’라는 호가 있습니다. 호는, 본명 외에 본인이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을 뜻해요. 주로 유교 문화권에서 사용되곤 하죠. 김환기도 직접 호를 지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무 수 라는 한자를 사용하려 했는데, 한 글자로 호를 지으니 어감이 이상해 그 상태로 그냥 두었다고 해요. 이후 말씀 화 라는 한자를 접하게 되었고, ‘수화’라는 이름으로 붙이니 제법 괜찮아서 수화라고 호를 짓습니다.

 

김환기는 <신천지>에서 수화라는 단어에 절대 어떤 의미는 없고, 그저 수화라는 뉘앙스가 괜찮아서 택했다고 밝혔어요. ‘아호는 대개가 고풍한 의미와 그러한 글자를 따오는 것이 지금도 상례인 것 같으나, 나는 이름에도 새로운 맛을 주려는, 과장해서 말하면 현대 아호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내 호에는 아무런 의미를 주지 않는 글자를 택하였던 것이다. 내 호가 고풍스러운지 현대 아호로서 격에 맞았는지 그건 모르되 수화 라는 호에는 약간 핸섬한 맛은 있다고 아호에 있어 약간 자부 같은 것도 없잖다.’

 

이처럼 김환기는 유머도 있고 위트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도 보였던 작가입니다. 그가 쓴 책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냐랴>에서는 그런 면모를 특히 더 잘 살펴볼 수 있어요. 일을 하다가 막혔을 때, 동료 예술가와 나눈 대화가 흥미로웠을 때, 작품을 만들다 든 감상 등 다양한 순간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김환기는 평생 아름다움을 그려온 작가고, 자신이 택한 아름다운 모티브를 평생에 걸쳐 발전시켜 온 작가이기도 합니다. 언뜻 고집스럽다 비칠 수도 있지만, 뉴욕에서의 경험으로 자기 성찰과 쇄신을 하며 마침내 전면점화라는 대작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런 이의 삶은 어땠을까, 작품을 보며 궁금해지기 했는데 책을 통해 그의 삶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어요. 전시에서도 김환기 일기를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으니, 함께 확인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김환기 작가의 모습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김환기를 비운의 작가라고 칭하는 이도 있습니다. 뉴욕 미술씬에서 인정받은 ‘전면점화’를 선보이고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늘날 20세기 한국 미술사에 그가 남긴 유산은 그의 이름을 값지게 빛내고 있습니다.

 

한평생 한국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한시도 쉬지 않는 자기 세계의 탐색과 정비를 이어나간 화가. 김환기. 여러분은 김환기의 생에 걸친 작품에서 어떤 걸 느끼셨나요? 

 

 

👀  작가 연혁 살펴보기 

1913년 2월 27일 전라남도 신안군 기좌면(현 안좌면) 출생 한국

1933년 (21세) 도쿄 동경일본대학 미술부 입학

1935년 (23세) 데뷔, 9월에 <종달새 노래할 때>로 22회 <이과전>에 입선함

1936년 (24세) 일본대학 미술부 졸업 후 미술부 연구과 진학

1937년 (25세) 1월, 동경 아마기 화랑에서 첫 개인전 개최, 이후 3월 일본대학 연구과 수료, 이후 4월 서울로 귀국

이후 연 1회 내외의 개인전 개최와 단체전 참여

1948년 ~ 1950년 (36~38세) 서울대 미대 교수 역임

1947년 ~ 1963년 (36세~51세) 서울시 문화위원회 위원 역임

1948년 (36세) 신사실파 결성: 유영국, 이규상과 함께

1948년 ~ 1955년 (36~43세)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1959 ~ 1962년 (47~50세)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1953 ~1955 (41세~43세) 홍익대 미대 교수 역임

1959~1962년 (47~50세) 홍익대 미대 교수, 학장 역임

1954~1974년 (42세~62세)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일함

1956년 (44세) 파리 출국, 여러 갤러리에서 개인전 출품

1959년 (47세) 한국 귀국, 홍익대 교수, 초대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역임, 개인전 계속 이어감

1960년 (48세) 서울 유네스코 국제조형 예술협회 한국상임위원회 회장에 피선

1963년(51세)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대표 참가, 명예상 수상, 이를 계기로 뉴욕 생활. 11년간 록펠러 3세가 설립한 아시아 소사이어티의 재정적 후원받으며 정착. 여기서 전면점화 탄생.

1965년 (53세)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특별실 초대

1970년 (58세) 한국일보사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대상

1974년 (62세) 뇌출혈로 쓰러졌고, 2주 뒤 뉴욕 유나이티드 병원에서 사망, 향년 6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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