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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셀프 브랜딩

천재를 동경한 찐천재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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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ubbits

츄파츕스의 포장 디자인을 한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 달리는 순수 예술가였지만 동시에 상업 디자인 분야에서도 엄청난 성과를 냈습니다. 그뿐인가요, 스릴러 영화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의 러브콜을 받아 영화를 제작하고, 디즈니와 함께 단편 애니메이션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강연을 진행하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전파하고, 살아있을 때 수 차례 자서전을 쓰고, 티비나 라디오 등 매체에 등장하길 꺼리지 않은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달리는 오늘날 현대미술 작가들의 귀감입니다. 난해해지고 치열해진 미술시장에서 작가들은 자신을 브랜딩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100년 전 활동하던 작가인 달리가 해온 것들이죠. 

 

 

© The-Gala Dali Foundation

천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숨 쉰다며, 자신의 죽음도 믿지 않는다고 말한 달리. 그의 말처럼, 그의 브랜딩 방식과 작품은 오늘날까지 회자되며 살아 숨 쉬고 있는 모습입니다. 최근엔 달리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했고, 워커힐시어터에서는 미디어 아트 전시 <달리와 가우디>가 진행 중이죠.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초현실주의 사조의 대표주자가 되기까지. 달리는 어떤 노력을 해왔을까요? 달리의 삶과 작품세계, 브랜딩 방식을 살펴봅니다. 

 

 

전형적이지만 평범하지 않았던, 달리의 유년기

© The Times

어떤 예술가든 꼭 알아두어야 할 시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유년기와 전성기죠. 유년기는 평생에 걸친 작품세계에 영향을 주고, 전성기는 그중 가장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들로 서사화됩니다. 달리의 유년기는 비극적 천재의 전형이었습니다. 너무나 클리셰적이지만, 평범하지만은 않았죠. 

 

달리의 위로는 형이 한 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살바도르라는 이름은 달리에게 붙여졌죠. 부모님은 달리가 형의 환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의료 환경 등 인프라가 좋지 않았기에 이런 일이 흔했다고 하는데요, 어린 나이의 달리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왔기 때문이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달리의 어머니에겐 우울증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엔 우울증이 흔해졌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죠. 달리는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를 보살피게 됩니다. 달리의 어린시절은 죽은 형의 대리인이면서, 어머니를 위한 봉사자로 규정됐습니다. '달리'라는 인물의 존재감이 가장 없었던 시기입니다. 

 

 

© The-Gala Dali Foundation

이후 달리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갖은 기행을 벌입니다. 게이인 친구를 아웃팅 시키거나, 여자아이를 계단에서 밀치거나, 염소 똥으로 만든 향수를 뿌리는 등 다양했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선 어머니 초상화에 침을 뱉기도 했고요. 

 

달리는 이런 과거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언급했죠. 그리고 '비극적 유년기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달리의 기행은 평생에 걸쳐 이어집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초현실주의 장르의 1인자로 서고 나서도 이어졌죠. 계속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달리의 일이었습니다. 

 

"신은 또 하나의 예술가이다. 나처럼 말이다"
"내가 다른 초현실주의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나 자신이 바로 초현실이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하는 한편, 달리는 진짜 천재가 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선천적인 재능도 있었습니다. 10대 때 이미 그림실력이 뛰어나 드로잉 학교에 입학했고, 18살이 되던 해에는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에 진학하기도 합니다. 왕립미술학교는 비싼 학비로도 유명하지만, 학생의 실력을 깐깐하게 보는 학교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작업들, Cubiest Self-Portrait (1923) / Still Life (1923) © Obelisk Art History

당시 달리는 이미 자신만의 독창적 화풍을 만들었습니다. 미래파와 입체파에 많은 영향을 받았죠. 미래파는 기계 문명의 발달과 함께 나타난 사조로,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문명의 속도와 모습을 담아낸 사조입니다. 입체파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조죠, 큐브 형태로 대상을 그려낸 피카소의 작품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대상을 작가의 관점대로 그려낸 것이 특징이죠. 이 시기 달리의 그림엔 미래파와 입체파의 영향이 담겨있습니다.

 

당시 마드리드에는 입체파 화가가 드물었기에, 달리의 독특한 화풍은 금세 눈에 띕니다. 달리는 인재들만 모아둔 학교에서도 실력자로 손꼽혔죠. 보수적인 미술계 원로가 보기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달리는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조금 오만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기엔 교수들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언행을 남기기도 했죠. 

 

 

초현실주의 1인자가 되기까지, 전성기의 달리

© The-Gala Dali Foundation

이후 달리는 학교를 자퇴합니다. 최근 많은 이들이 퇴사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듯, 달리도 자퇴 후 자신의 관심사에 몰입합니다. 당시 달리의 관심에 있던 건 '무의식' 개념이에요. 무의식 개념은 그간 사람들이 '의식'에만 집중해 왔던 것에 반해 무의식 개념을 제시하며, 많은 지지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무의식 개념은 빠르게 떠오르는데요. 이런 흐름을 가속화 한 건, 당시 사회적 분위기였습니다. 무의식 개념이 등장할 당시엔 제1차 세계대전 등 큰 사건이 발생하며, 사람들이 현실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동안 합리적이라고 믿어오던 '이성'이 과연 옳은 것인가 고민했죠. 이럴 때 사람들에겐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습니다. 과거의 사례에서 해답을 찾거나, 현실을 도피해버리거나.

 

무의식 개념은 후자에 더 가까웠습니다. 많은 철학가와 예술가는 무의식 개념을 파고들었고, 그중 앙드레 부르통을 선두로 초현실주의 사조가 등장하게 됩니다. 르네 마그리트, 이브 탕기, 막슨 에른스트 등 많은 예술가가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활동했고, 그 사이엔 대학을 갓 자퇴한 20대 초반의 살바도르 달리도 있었습니다. 

 

 

© The-Gala Dali Foundation

달리는 '나는 초현실주의자들과 다르다. 내가 초현실 그 자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처럼, 달리는 달랐습니다. 당시 초현실주의자들은 대부분 엘리트 출신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권위적이고, 선민사상도 내재하고 있었죠. 하지만 달리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강연이나 인터뷰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이 주목받는 공간에선 언제나 활기 넘치게 자신을 드러냅니다. 

 

달리가 활동하던 시기엔 라디오와 신문 같은 매체가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달리가 남긴 파격적인 언행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달리의 잘생긴 외모와 특유의 콧수염은 그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달리는 언론의 파급력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언론은 싫지만, 매체에 나오면 내 그림값이 올라서 좋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죠. 

 

이처럼 달리는 언론을 통해 자신을 인식시키고, 브랜딩하고, 작품을 팔아 큰돈을 법니다. 하지만 입으로 흥한 자, 입으로 망한다는 말이 있듯 달리의 언행이 문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초현실주의자들 안에서요. 초현실주의가 현실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 만큼, 현실의 물질주의를 비판하는 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요. 달리는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독재자를 옹호하는 발언 하며 갈등을 빚게 됩니다. 이후 제명당하게 되었죠.

 

 

© The-Gala Dali Foundation

하지만 달리는 성실함을 겸비한 천재였습니다. 이 성실함은 단순 그림에 대한 열정만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달리는 사회 흐름을 빠삭하게 알고 공부하던 인물이었습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을 공부한 것처럼 과학 이론을 공부했고, 그림에 대한 연구도 이어나가며 고전 문학, 고전 예술품에서 따온 모티브를 작품에 적용시킵니다.

 

달리의 성실함은, 달리를 정말 초현실주의자들과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학문과 과거 유산에서 영감받은 탄탄한 그림은 달리만의 차별성이 되었고, 예술성을 인정받으며 살아있을 때 큰돈과 명예를 얻게 됩니다. 

 

 

현대미술 대표 작가로 살펴보는 달리의 브랜딩 방식

© The-Gala Dali Foundation

그렇게 초현실주의의 1인자가 된 달리. 달리의 전략은 치밀했고, 이를 이행하는 과정은 성실했습니다. 이는 현대미술 작가들에게 그림 외적인 부분에서도 많은 영감을 줍니다. 현대미술은 과거 미술에 비해 난해해지고, 어려워지는 흐름을 띕니다. 기반지식이 없다면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그림도 있습니다. 이를 상쇄하는 게 작가의 브랜딩입니다.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 중 가장 강력한 요소는 작가의 매력도죠.

 

여기엔 미술품 투자가 점점 활발해지게 된 흐름도 한몫합니다. 주식을 사거나 회사에 투자할 때 경영자를 살펴보는 것처럼, 미술품을 사고팔 때에도 예술가의 캐릭터가 작품 가치에 영향을 미칩니다. 오히려 다른 투자 수단보다 오너리스크가 강력한 분야이기도 합니다. 작품의 주인인 예술가가 어떤 사람인지가 작품성, 작품 세계와 직결되기 때문이죠.

 

 

[1] 셀럽형_ 앤디 워홀

© National Today

달리의 선구적인 브랜딩 전략은 오늘날 현대미술 작가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앤디 워홀이에요. 달리와 앤디 워홀은 '스타 마케팅'을 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전략을 취합니다. 앤디 워홀은 팝아트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당시 활동하던 예술가 중 가장 셀럽에 가까웠던 인물입니다. 여기엔 강력한 전략이 뒷받침 돼 있어요. 앤디 워홀의 진짜 성격은 매우 내성적이지만, 카메라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 달려가 언론에 본인을 노출시키고, 자극적인 뉴스를 흘렸습니다.

 

앤디 워홀이 당시 선보인 건 실크스크린 작업이었습니다. 상업 광고에 주로 사용되던 실크스크린은, 프린터와 도장을 섞은 듯한 특징이 있습니다. 작품의 기본 틀만 만들어두면, 이후엔 단순 작업으로 찍어내기만 하면 되죠. 덕분에 작업 제작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었고, 확보한 시간을 앤디는 대외활동에 썼습니다. 

 

 

음산한 유희 Le jeu Lugubre (1929) © The-Gala Dali Foundation

앤디의 대외활동은 철저히 본인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기자가 기사를 쓸 수 있도록 마음에도 없는 남성과 키스하거나, 부유한 이들과 어울리는 등 다양한 전략을 취했죠. 이는 100년 전의 예술가인 달리가 취한 전략이기도 합니다. 달리는 1929년에 첫 개인전을 열면서 <음산한 유희>를 선보였는데요. 이 작품엔 변이 묻은 속옷을 입은 남자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달리가 배설물을 통해 욕구를 채우는 변태 거나, 식분증 환자가 아닐까 의심합니다. 하지만 달리는 이를 예상하고 일부러 그렸다고 언급해요. 유명해지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고 인터뷰를 통해 밝혔죠. 이처럼 달리와 앤디 모두, 언론의 특성을 파악하고 이용해 본인의 유명세를 더합니다.

 

 

[2] 기획자형_ 데미안 허스트

© The Guardian

둘째로는 데미안 허스트의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데미안 허스트는 푸른색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상어를 넣어 박제한 작업,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을 선보인 작가인데요. 충격적인 작품으로 어린 나이에 이름을 알렸지만, 달리와의 공통점은 새로운 도전을 꺼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기획자'적 면모를 가졌다는 겁니다. 

 

데미안 허스트는 예술가 중 최초로 경매회사와 협업해 작품 판매를 진행한 인물입니다. 그간 예술가가 작품을 파는 방식은 단순했습니다. 의뢰받은 작품을 제작해 판매하거나, 갤러리와 계약해 5:5로 수익을 나눠 가지거나. 하지만 경매회사는 작품 판매가의 100%를 의뢰인에게 전달했고, 수수료만 받는 식으로 운영됩니다. 때문에 경매회사와의 협업은 예술가에게 엄청난 이득이었죠.

 

 

데미안 허스트 경매 당시의 모습 © Sotheby's

하지만 예술가와 경매회사는 보통 친하지 않습니다. 경매에서 작품이 고가에 낙찰되면 다른 작품들도 가격이 오르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야 합니다. 작품이 평균 시세보다 낮은 금액에 낙찰되거나, 최악의 경우 구매자가 없어 유찰되면 작품 가격이 떨어지기도 하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경매회사에 작품이 유통되는 걸 꺼리는 예술가도 많습니다. 하지만 데미안 허스트는 본인이 직접 나서 경매회사와 계약을 진행했죠. 그리고 1,686억 원에 달하는 작품 판매 수익을 전부 챙기게 됩니다.

 

달리 역시 이런 기획자적 면모가 엄청났던 인물입니다. 당시 활동하던 예술가로서는 드물게 무대 디자인, 무대 의상 디자인, 영화 제작, 애니메이션 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업하며 새로운 시도를 이어나갔죠. 모험을 감수하는 담대함도 높이 평가받지만, 새로운 시도에 적응하고 전략을 세우는 기획자적 면모는 달리와 데미안 허스트의 독보적 특징입니다.

 

 

[3] 이론가형_ 무라카미 다카시

© The Collector

무라카미 다카시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순수 예술의 영역으로 끌고 온 예술가입니다. 다카시와 자주 언급되는 건 앤디 워홀입니다. 앤디 역시 상업 예술을 순수 예술의 영역으로 끌고 왔기 때문이죠. 하지만 브랜딩 전략 차원에서 더 비슷한 건 달리입니다. 

 

달리는 이전에 자신만의 이론을 주창했습니다. '편집광적 비판 이론'. 이는 정신 질환의 하나인 편집광 상태에서 착안한 이론인데요. 편집광 상태의 환자가 어떤 물체를 볼 때,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아닌 전혀 다른 별개의 물체로 보는 증상에서 따왔습니다. 달리는 편집광적 비판 이론을 토대로, '이중형상'작업을 선보여요. 하나의 그림인 것 같지만 두 가지로 보이는 형태의 그림입니다. 이중형상 시리즈는 초현실주의 특유의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달리를 초현실주의 1인자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 Hypebeast

이처럼 무라카미 다카시 역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이론을 주창합니다. '슈퍼플랫' 이론이었죠. 슈퍼플랫은 일본 전통화부터 애니메이션까지, 납작하고 평면적인 그림의 특성을 아우르는 게 특징입니다. 다카시는 예술가로서는 드물게 박사학위까지 받은 인물인데요.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이론에 담아내며 본인 작업의 탄탄함을 이론을 통해 증명해 냅니다. 달리가 편집광적 비판이론으로 초현실주의 1인자가 된 것처럼, 무라카미 다카시 역시 살아있는 현대미술가 중 손꼽히는 예술가가 되었죠.

 

© The-Gala Dali Foundation

오늘날 달리의 전략은 현대미술 거장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100년 전의 예술가가 모두 이미 진행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되죠. 특별한 레퍼런스 없이 선구자가 된 달리의 전략은 오늘날 우리가 그를 진짜 천재로 인식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술가로서 성실함은 겸비한 채, 새로운 시도와 전략을 선보인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 여러분은 달리의 이야기에서 어떤 것을 느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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