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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셀프 브랜딩

중국을 혐오한 중국 예술가, 아이 웨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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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hang Xiaogang, Bloodline: The Big Family No. 3. (1995)  © Artnet

모든 중국 예술가는 국가의 검열을 당합니다. 정치와 전혀 연관 없는 작업을 하는 작가도 마찬가지죠. 이들은 모두 자기 작업을 정치와 연관 짓지 않으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모든 작업을 정치와 연관 짓는 중국 작가도 있습니다. 바로, 아이 웨이웨이죠.

 

 

그가 정치를 작품에 끌고 온 이유

Ai weiwei © Vox

그의 작품은 도발적입니다. 자금성에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거나, 감시와 검열을 상징하는 작품을 만들거나, 한나라 시대 유물을 박살내는 등 다양하죠. 작품이 문제가 되며 강제 연행된 적도 많은데, 그 순간 셀카를 남겨 이를 작품화했습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에는 코로나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며, 연구 중 유출되었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고요.

 

모두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다루는 수위 높은 작업들인데요.

 

아이 웨이웨이가 이렇게나 중국에 저항하게된 계기는 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66년, 중국 문화예술계 흑역사라 불리는 '문화대혁명'이죠. 새로운 공산주의 정책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모든 걸 불태워버렸습니다. 시, 소설, 미술작품 할 것 없었고, 이 시기 활동하던 지식인 50만 명이 사라지거나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아이 웨이웨이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어요. 어린 나이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 수 있는 나이죠. 아이의 아버지는 중국의 유명 시인인 아이칭인데, 조금 사정이 나았습니다. 공중화장실 청소하는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았어요. 대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로 유배됐습니다. 전기나 수도도 없는 지하 구덩이에서 살았죠. 9살의 아이 웨이웨이는 질병과 영양실조에 시달렸고요. 그렇게나 낙후된 지역인데도 홍위병은 급습해서 죄를 씌울 물건을 뒤지곤 했습니다. 때문에 당시 아이칭은 본인의 자식 같은 작품을 다 불태워버렸어요.

앤디 워홀 작품 앞에 선 아이 웨이웨이  © Interview Magazine

역설적으로 이 시기, 아이 웨이웨이는 결심합니다. 예술가가 되겠노라고. 예술가가 가장 핍박당하던 시기였지만, 아이는 그 순간 아버지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따뜻한 무언가를 느꼈다고 해요. 그렇게 12년간 뉴욕에서 유학 생활을 한 후, 고향 베이징으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정치하는 예술가 VS 예술하는 정치인

© Guggenheim Museum
원근법 연구 연작 Study of Perspective series © Public Delivery

중국 유학파 1세대인 아이의 작품은 상당히 파격적이었어요. 38살에 선보인 <원근법 연구>. 이 작품은 전 세계의 여러 랜드마크 앞에서 자신의 중지를 세우고 있는 것을 찍은 사진 연작이에요. 중국의 자금성을 비롯해, 세계의 랜드마크를 찾아가 가운데 손가락을 내보이며 찍은 사진이죠.

 

그런데 제목과 달리, 이 작품은 원근법과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원근법은 멀리 있는 걸 작고 흐리게 그리고, 가까이 있는 걸 크고 뚜렷하게 표현해요. 하지만 아이의 사진을 보면, 초점을 멀리 있는 대상에 맞춰, 가까이 있는 손이 더 흐릿하게 보입니다.

 

© Hypebae

작품이 담고 있는 진짜 메시지는 ‘저항’이에요. 각 랜드마크는 권위, 정부, 제도권 등을 상징합니다. 아이는 이런 권위와 제도가 개인에게 가하는 억압과 불평등에 집중해 권력과 제도를 비판한 것이죠. 

 

당연히 중국 정부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을 놓고 아이 웨이웨이를 심문했죠. 문화대혁명 시기였다면 이 사진 한 장으로 처형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는 제목을 통해 다양한 해석 여지를 강조하며 작품을 계속 이어갑니다.

 

Dropping a Han Dynasty Urn (1995)  © Public Delivery

같은 해 선보인 다른 작품 역시 도발적이었어요. 기원전 2세기 경 만들어진 한나라 시대 유물, 도자기를 떨어뜨려 박살 내는 퍼포먼스였죠. 2000살이 넘은 도자기를 깨뜨리는 사진 속, 아이 웨이웨이 얼굴은 무표정합니다. 때문에 중국의 유산을 조롱하는 의미로 오해하기 쉽지만, 아이는 1990년에는 생업으로 고미술품 매매를 하기도 했을 정도로 문화재에 대해 지식이 많아요.

 

이 작품은 오히려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 그들이 지워버린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기 위한 퍼포먼스였습니다. 많은 문화재가 문화혁명 시기 공산당 때문에 소실됐고, 얼마 남지 않은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 것이죠. 이후 아이는 고대 도자기에 코카콜라 로고 같은 서구의 대표적 상표를 그리거나, 전통 공예 장인에게 옛날 의자나 탁자를 재조합하게 해 다리가 여러 개 달린 초현실 조각을 제작합니다. 중국의 전통문화를 재해석한 시도는 신선하게 비춰졌고, 고미술품 레디메이드라 불리며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불리기도 했어요.

 

좌- 파토 셸달, 우- 로버타 스미스  © Artnet News, Artsy

하지만 평론가들의 시각은 조금 달랐습니다. 뉴요커의 파토 셸달 Peter Schjeldahl은 ‘아이 웨이웨이는 정치 미술가인가, 솜씨 좋은 정치인인가?’라며 그의 행보에 의문을 제기했고, 뉴욕타임스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 로버타 스미스 Roberta Smith는 ‘미술가의 역할을 훌륭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그런것 치고는 훌륭한 작품을 내놓지 않는다’고 논평했어요.

 

또 그의 작품이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자극적인 작품이라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술가라면, 좀 더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죠.

 

© Artsy

이에 대해 아이 웨이웨이는 좀 다른 관점을 제시해요. ‘문제점을 찾아내고 비판하는 것은, 중국의 맥락에서는 충분히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행동’이라고요. 내가 정치에 개입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단순히 엿먹이는 짓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고 말했죠.

 

이미 아이 웨이웨이는 중국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중국 정부는 인터넷에서 그의 존재를 완벽하게 지웠어요. 중국의 구글에 해당하는 포털 사이트 바이두에 ‘아이웨이웨이’라는 이름을 입력하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S.C.A.R.E.D (2013)  © Artsy

보이지 않는 곳에선 끔찍한 일도 벌였어요. 아이는 갑작스레 구금당해 심문만 50번 넘게 당했고 이후엔 고강도의 고문, 세뇌교육, 학대를 받았습니다. 이유도 명확하지 않아요. 중국 법에 따르면 수감자의 구금 사유를 40일 이내 가족에게 고지해야만 하는데요. 그러나 아내 루칭도 아이 웨이웨이 모친도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아이 웨이웨이는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는 일은 모든 미술가의 책임이라고 강조해요. 그리고 누구보다 치열한 투쟁을 벌이며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작가

Fairytale (2007)  © Art Sonje Center

언제 또 행방불명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지만, 아이는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2007년 선보인 <동화> 퍼포먼스가 대표적이에요. 독일 소도시 카셀에서 열리는 영향력 있는 전시, 도큐멘타 기간 동안 유럽에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중국인 1001명을 카셀에 데려간 퍼포먼스예요.

 

현대미술의 주요한 가치 중 하나는 사람들이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에요. 아이 웨이웨이는 미국에서 12년 간 체류한 경험이 있어서, 해외에서 보낸 시간이 사고를 확장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참여자를 모집해 이 퍼포먼스 진행해요. 중국인들이 중국에 갇히지 않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길 제시한 것이죠.

 

Sunflower Seed © Wikipedia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작품은 또 있습니다. 2010년작 <해바라기 씨>. 이 작품은 진짜 씨앗이 아니라, 손으로 정교하게 만든 미니어처 도자기 조각 백만 개를 모아 놓은 것이에요. 차이나는 중국을 뜻하면서 도자기를 뜻하기도 합니다. 해바라기 씨 하나당 중국인 13명을 의미한다고 해요. 이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인 중국을 재현한 것이죠.

 

아이는 이 작품 제작을 위해, 낙후된 마을에서 인력 1600명을 모집했어요. 그리고 그들이 받는 평균 임금의 약 세 배를 급여로 지급했죠. 제작 기간은 2년 6개월. 이 작품을 통해 그는 마을 하나를 실업에서 구제하기도 했습니다.

 

© Artsy

도자기로 만들어낸 백만 개의 해바라기 씨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한 작업이라 불려요. 나아가 산을 움직일 수도 있다는 야망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중국이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하는 희망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이의 아내이자 동료 예술가인 루칭은, 이 작업이 가장 아이 웨이웨이스럽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 Artsy

책 <예술가의 뒷모습>에서는 아이 웨이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정부의 선전선동이 오랫동안 장악하고 있던 나라에서 진실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드물며,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왜곡하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를 확고하게 수호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웨이의 신념 추구는 중국인들과는 매우 다르다. 사실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대립을 일삼는 방식은 말할 것도 없다. 인권에 대한 웨이의 신념은 중국적이지 않다.”

 

하지만 아이는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는 일은 모든 미술가의 책임입니다.”라고 말하며, 대부분의 중국인들과 매우 다른 행보를 보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중국적인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이기도 해요. 그의 모든 작품이 중국 정치를 정조준하고 있으니까요. 

 

© Flicker

때로는 아플 만큼 노골적이게, 때로는 따뜻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조국을 비판하는 예술가.

여러분은 아이 웨이웨이의 작품에서 어떤 면모를 느끼셨나요?

 

 

 


영상으로도 아이 웨이웨이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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