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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 예술사

모네 '해돋이'로 보는 인상주의의 탄생 | 미시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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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uade Monet, Impression, Sunrise (1872) © Wikipedia

 

모네의 <인상, 해돋이> 이 작품은 인상주의의 탄생을 알린 작품입니다. 흐릿하고 뭉툭한 붓질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인상주의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죠.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난해하다 느꼈습니다. 오늘날 현대미술을 난해하다고 느끼는 이가 많은 것처럼, 이 그림을 본 많은 이들은 '현대미술이 난해해지는구나'하고 느꼈죠.

 

이 그림은 기존의 것과 많이 달랐습니다. 멀리 있는 것을 흐릿하게 그리고, 가까이 있는 것을 선명하게 그리는 원근법과 달리, 이 그림은 모든 것이 모호하고 뭉툭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선명하게 보이는 건 떠오르는 해와 그 아래 노를 젓는 인물 정도죠. 이 그림에서 중요한 건 정확하게 그리는 게 아니라, 순간의 느낌을 포착해 작가가 느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 그림과 아주 달랐습니다. 당시에 그려지던 그림들엔 몇 가지 특징이 있었어요. 우선, 사진만큼 디테일하게 그려졌습니다. 아직 카메라가 상용화되기 전이라, 그림이 사진의 역할을 대신했거든요. 물론 그림은 사진보다 훨씬 공수가 많이 들어가기에, 최대한 이상적으로 그려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보는 기준을 모두 갖춰서 그림으로 그려냈죠. 그게 초상화든, 풍경화든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림 속 인물은 모두 흠결 없는 피부를 자랑했고, 최고로 멋진 옷을 입고 있었어요. 풍경화 역시 일상적인 모습보다는 아름다운 여행지의 모습을 그려낸 게 많았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SNS에 최고의 사진만 골라 업로드하는 것처럼요. 

 

이렇게 사회가 아름답다고 규정한 기준에 딱 맞게 그려진 그림은 '아카데미 화풍'이라 불려요. 이런 아카데미 화풍 중 잘 그린 그림을 선발해 선보인 전시도 있었습니다. 매우 엄격한 심사로 알려진 '살롱전'이죠. 살롱전의 영향력은 막대했습니다. 당시엔 전시를 열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고, 정부가 직접 연 전시인 데다가, 파리 중심부에서 전시가 열려 접근성도 매우 좋았기 때문이죠. 때문에 당시 활동하던 화가들에게는 살롱전이 꿈의 전시처럼 불렸습니다. 실제로 살롱전에 출품한 작가와 그렇지 못한 작가 간 부익부 빈익빈도 있었고요.

 

1787년 열린 살롱전의 모습 © Wikipedia

 

하지만 아무나 작품을 출품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체 작품 중 66%정도는 낙선했다고 하는데요. 이게 몇 해 반복되자, 출품을 거부당한 작가들의 분노가 상당해집니다. 정부 입맛에 맞는 그림만 그림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죠. 낙선한 화가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당시 집권 중이던 나폴레옹 3세는 이들을 위한 전시를 열어주기로 합니다. 살롱전이 진행되는 근처에 '낙선전'이라는 이름의 전시를 연 것이죠. 

 

하지만 대부분의 화가는 낙선전을 거부했습니다. 거기서 조롱거리가 되느니, 차라리 작품을 전시하지 않겠다고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선전에는 15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됐어요. 오늘날 열리는 전시의 평균 작품수가 100-200점 내외인 걸 생각하면 상당한 규모죠. 큰 전시 규모만큼 관객도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선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마련이죠. 낙선전은 인상주의의 탄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Edouard Manet, Lunch on on the Grass (1862) © Wikipedia

 

낙선전을 보러간 관객들은 진지하게 작품을 보기보다 조롱하려고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때문에 욕먹을 여지가 많은 작품 앞에 관객이 몰리는 독특한 모습을 자아내기도 했어요. 그중 가장 인기 있었던 못 그린 그림은,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였습니다. 이 그림은 나체의 여인이 정장을 갖춰 입은 남성과 숲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모습을 담고 있어요. 언뜻 보면 아카데미 화풍을 잘 따른 듯 그려진 이 그림은, 사실 많은 반전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을 좀 볼 줄 아는 관객들은 이 그림을 보고 엄청나게 분노했죠.

 

그들이 분노한 첫번째 이유는 그림 속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옷을 벗고 있어요. 당시에도 누드화는 자주 그려지곤 했지만, 누드화를 그릴 때의 규칙이 있었습니다. ❶ 현실이 아닌 신화 속 인물을 그릴 것. 누드화는 벗은 몸을 보이는데, 이게 실존 인물인 경우와 가상 인물인 경우의 관객이 느끼는 죄책감이 달라지기 때문이죠. ❷ 여성이 부끄러워할 것. 옷을 벗고 있기에 시선을 회피하거나 몸을 가리는 등 부끄러워하는 게 미덕이라 생각했습니다. ❸ 체모를 그리지 말 것. 이 그림의 경우엔 가려져 있지만, 누드화에 체모를 그리는 건 절대 금기시됐습니다. 그림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며 불쾌감을 자아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에요.

 

Sandro Botticelli, The Birth of Venus (1484-1486) © Wikipedia

 

하지만 <풀밭 위의 점심식사> 속 여성은 여신도 아니었고, 매우 당당하게 관객과 눈을 마주치고 있습니다. 이는 관객에게 불쾌감을 자아냈어요. 누드화를 보는 관음적 관람 태도를 지적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이 때문에 관객은 지나치게 도발적이라며 거부감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분노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어요. 그림의 투박한 붓질 때문입니다. 기존 아카데미 화풍은 붓터치 하나하나 꼼꼼하게 그려내 매우 높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피부를 그릴 때는 뽀얗게, 옷이나 풍경을 그릴 때는 그 질감이 잘 드러나게 그려냈죠. 하지만 이 그림은 매우 거칠고 빠르게 붓질한 걸 볼 수 있어요. 작품이 완성되지 않은 듯한 느낌을 줍니다.

 

Edouard Manet, Lunch on on the Grass (1862) © Wikipedia / Cluade Monet, Impression, Sunrise (1872) © Wikipedia

 

언뜻 아카데미 화풍과 비슷해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매우 많은 그림. 이는 그냥 못 그린 그림보다 더 큰 불쾌감을 자아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이 그림을 보고 '매우 오만하다'면서 작품에 채찍질을 하기도 했어요. 놀랍지만 사실입니다. 자극적인 에피소드로 이 작품을 보러 오는 관객은 점점 더 많아졌어요. 그리고 이런 흐름 속, 예술가들은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기 시작해요. 이런 식으로 아카데미 화풍에 저항해 그린 그림이, 무언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본 것이죠.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인상, 해돋이>였습니다. 

 

하지만 여론은 안 좋았습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그래도 아카데미 화풍의 느낌이라도 내는데, <인상, 해돋이>는 더 모호하고 뭉툭한 붓터치로 그려내 기존 그림과 완전히 다른 난해함을 자아냈습니다. 더구나, 국가가 기획한 '낙선전'이 아닌 예술가들이 직접 기획한 사설 전시를 통해 작품이 선보여졌어요. 이건 국가 시스템에도 저항하겠다는 발칙함으로 읽히면서 더 큰 비난을 받았어요. 

 

가장 대표적인 비난은 미술 평론가, 루이 르루아가 남긴 말입니다. "본질을 찾아볼 수 없고, 표면적인 인상만 그렸다"는 내용이었죠. 이 평론을 계기로 모네를 비롯해서 흐릿하고 뭉툭한 그림을 그린 화가들에게 이름이 생깁니다. '인상주의자'라는 이름이었죠. 이 일련의 에피소드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떠올리게 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 움직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이름을 붙여주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기존 아카데미 화풍과는 다른 노선을 구축해서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들은 그림에 예술가의 '개성'을 담아냅니다. 기존 그림은 초상화, 풍경화 등이 메인이라 기술적이고 실용적이었다면, 이들의 그림은 예술가의 개성과 감성을 담아내 예술 작품으로서의 특성을 부각했죠.

 

그리고 이 시기, 타이밍 좋게 사진 기술이 상용화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신기술에 열광했어요. 초상화를 의뢰하던 이들은 사진으로 찍은 가족사진을 소비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문에 아카데미 화풍은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죠. 사진이 그림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했기에, 기술적이고 실용적인 그림은 메리트를 잃게 된 것입니다. 

 

반 고흐, 폴 고갱, 폴 세잔

 

그러면서 사진은 구현할 수 없는, 예술가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인상주의가 비로소 주목받게 됩니다. 후에 반 고흐, 폴 고갱, 폴 세잔 같은 후기 인상주의 예술가가 등장하며 예술의 흐름이 달라졌다 평가받습니다. 예술가의 역할이 '재현가'가 아닌, 예술가의 관점을 담아 그려내는 진정한 예술가로 도약한 순간이었죠. 

 

오늘날 <인상, 해돋이>의 작품 가치는 약 4500억 원으로 추정됩니다. 미술사의 흐름을 바꾼, 의미있는 작품인 덕분이죠. 작품 자체가 가진 미술사적 가치 외에도, 작품이 가진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명을 줍니다. 모두가 비난하는 상황에서 뚝심을 가지고 있어간 작품이 달라진 사회적 분위기 속 세상을 바꾸게 되었으니까요. 해돋이 작품을 보며, 비난을 이겨낸 예술가들의 노력을 곱씹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Cluade Monet, Impression, Sunrise (1872)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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